미국 정부가 저지른 최악의 생체실험 - 6시, 이모저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물학무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시 전쟁이 생길 것을 우려했고, 소련과 독일보다 더 빨리 무기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정부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 극소수는 정부가 하는 것을 절대 따르지 않기도 했다. 얼마나 잔혹한 실험이었을까?

미국 생체실험

필라델피아 엘드리지호 실험

제2차 세계대전, 미 해군은 독일의 고성능 잠수함인 유보트에 의해 공격당했다. 그래서 미국은 해군들을 위한 최고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인슈타인, 니콜라 테슬라, 컴퓨터 중앙처리장치 내장형을 개발한 폰 노이만이 모였다. 당대 미국 최고의 천재들로 구성된 이 실험의 이름은 프로젝트 레인보우라고 불린다.

테슬라는 이 실험을 반대하며 떠났고 폰 노이만이 전담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실험은 배의 변압 장치인 테슬라 코일을 이용해 특수한 자기장을 형성하여 전기를 흘려보냈다. 그래서 적군의 레이더에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지만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선체 주위로 안개가 생겼고 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엘드리지 호는 순식간에 400km 이상 떨어진 노포크 항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전류를 끊고 배 안을 살펴봤다. 생지옥이 이런 걸까? 배에 탑승한 승조원들은 대부분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방대한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정신이상을 보였다. 이 실험은 최고의 보안 단계의 군사비밀로 묻히게 됐다.


군사 세균(박테리아) 실험

195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가상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비밀 훈련을 시행했다. 이 비행 훈련은 두 가지 종류의 세균을 형광 입자를 이용해서 도심에 뿌렸다. 이 세균은 박테리아였고,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은 이 훈련을 몰랐다. 계산해보면 최소 80만 명이 박테리아를 흡입했다. 나중에 연구를 통해 박테리아가 요로 염증과 폐렴 증세를 유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테리아로 사망한 환자의 유가족들이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했지만 패소했다.

다이옥신 고엽제 테스트

미국의 클리그만 교수는 미군을 대상으로 다이옥신 성분이 들어있는 황색 고엽제의 인체실험을 시행한다. 실험 대상은 홈스버그 감옥에 있는 죄수였다. 클리그만 교수는 빠른 연구 진행과 결과를 위해 기본 용량의 400배 이상을 투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쓸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1981년 미국 환경보호국에서 홈스버그 교도소에 있던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요한 문서들은 폐기되었고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고엽제 성분이 들어있는 에이전트 오렌지가 숨어있는 정글을 파괴하다가 증거를 발견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 사람들과 참전 병사들은 유산, 기형 발생, 암, 피부질병 등에 걸렸다. 피해자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터스키기 사건

1930년대 당시 미국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각했다. 흑인을 집을 관리하는 하인으로 고용하면서도 화장실을 쓰지 못하게 했다. 흑인은 중요한 업무를 절대 맡을 수 없었다.(영화 히든 피겨스) 유색 인종의 화장실과 백인 화장실이 따로 있을 정도로 차별이 심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힘 있는 사람들은 백인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

그래서 흑인들만 사는 동네가 따로 있었는데 매독이라는 전염병이 돌았다. 미국 정부는 이것으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매독을 치료하지 않고 또 다른 성병이 걸리도록 유도했다. 매독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매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연구했다. 매독 치료제(페니실린)가 개발되었던 시기였는데도 치료해주지 않았다.

존 커틀러 교수는 간질로 입원한 여성에게 매독에 걸린 환자의 피를 주입했다. 나쁜 피(빈혈, 매독, 피로증 등)를 치료하는 백신이라고 접종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5,500여 명이 실험에 이용되었고 1,300여 명이 성병에 감염되었다. 이들 중 83명이 사망했다. 과테말라에서는 9살이 된 어린아이를 실험에 이용했다고 발표했다.

1996년 성병 조사 임무를 맡고 있던 피터가 실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1972년에 퇴사했다. 그리고 신문기자인 친구에게 제보를 해서 공개되었다. 1973년, 드디어 실험이 멈추게 됐다. 실험에 참가한 의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인데 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죽는 게 낫지 않아요?"


흑인들은 분노했고 정부와 학계를 믿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코로나 백신도 접종을 거부하는 이유도 이 사건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실험을 주도한 존 커틀러는 인체실험을 통해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죽을 때까지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는 행복한 삶을 살다가 떠났다. 그리고 2008년에 터스키기 실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2022년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았다.


 

흑인 매독 환자 생체실험 '터스키기 사건' 50년 만에 사과받다

1932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州)에서 공중위생국과 터스키기연구소가 흑인 소작 농부 600명을 대상으로 비밀 생체 실험을 시작했다. 의료진은 흑인들에게 매독, 빈혈, 피로증 등을 합쳐서 일컫는

m.hankookilbo.com


가스 생체실험

제2차 세계대전, 군인이었던 롤린스 에드워즈는 다른 군인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훈련으로 말하면 화생방과 비슷한 훈련이었다. 군인들이 가스실에 입장했고 겨자가스와 화학작용제가 주입됐다. 군인들은 기절하고 비명을 지르며 탈출을 시도했다.

이 실험을 하게 된 진짜 이유가 1993년에 공개됐다. 미군이 자국 군인 6만 명에게 화학가스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실험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흑인이었다는 점이다. 흑인이 화학가스에 저항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흑인이 저항력이 강하다면 전쟁을 할 때 흑인을 최전선에 배정하기 위한 전략적인 실험이었다.

이 실험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유전자 손상, 피부 수포, 백혈병, 피부함 등의 부작용을 떠안게 되었다. 지금도 피부발진으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있지만 피해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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